1. 염불은 무엇인가?
염불(念佛)이란, 문자 그대로는 「부처를 생각함」 또는 「부처를 염송함」이라는 뜻이며, 수행의 목적으로 부처님의 이름을 마음으로
간절히 생각하거나 소리 내어 부르는 행위를 말합니다. 다만 어느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느냐는 각기 수행 방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정토신앙에서는 기본적으로 「나무아미타불」의 육자명호를 마음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부르는 수행이 기본이 됩니다.
2. 왜 「나무아미타불」의 염불을 하는가?
염불은 중생이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가 아니라 아미타여래께서 우리 중생을 반드시 구제하겠다는 다짐의 목소리이며 우리를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시는 고귀한 음성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명호를 부르는 것은 단지 아미타불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에 지
나지 않습니다.
또 염불은 아미타여래께서 자신의 공덕을 모두 우리에게 회향해 주는 것이기에 중생은 아무런 노력과 수고 없이 그 혜택을 현세와
내세(來世)에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염불은 중생의 소원을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아미타여래의 마음(공덕)을 그대로 우리
의 마음에 담아 내는 것이기에 그 효과는 불가사의(不可思議) 하다 할 수 있으며 그러한 본원력(불력)에 의해서 중생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불성을 일깨워 일심의 세계로 회귀하는 것입니다.
3. 이하백도의 비유
선도의 『관경소』 산선의 삼심석 중의 회향발원심석(回向發願心釋)에서 설하고 있는 비유로 과거로부터의 선근공덕을 회향함으로써 정토왕생이 성취되는 것에 대해 비록 이견(異見)·이학(異學)·별해(別解)·별행(別行)의 사람들에 의해 부정되었지만, 결코 흔들려 파괴 되지 않고 일심으로 왕생을 믿고 유연(有緣)의 행을 실천해 나갈 굳은 결의를 가져야 함을 설한 비유이다.
이곳에 한 여행자가 있어 백 천 리 먼 길을 서쪽을 향해 가려고 한다. 그 도중에 갑자기 두 개의 강이 나타난다. 하나는 불의 강으로 남쪽에 있고 다른 하나는 물의 강으로 북쪽에 있다. 그 두 강은 각각 폭은 백보(百步)이며, 어느 쪽도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고 끝없이 남북으로 이어져 있다. 그 물의 강과 불의 강 사이에 외길의 하얀 길(백도)이 있다. 그 폭은 겨우 4~5촌(12~15cm) 정도이다. 또 동쪽 기슭에서 서쪽 기슭까지의 길이도 백보(百步)이다. 물의 강에서 쏟아지는 세찬 파도는 하얀 길을 덮고, 불의 강은 불길을 일으켜 하얀 길을 태운다. 물과 불이 한 번씩 바꾸어 가며 하얀 길을 덮치면서 잠시도 그치지 않는다.
여행자가 끝없는 광야에 다다랐을 때 인적이 끊긴 곳에 도적들과 무서운 짐승들이 나타나서 혼자 있는 여행자를 보고 앞다투어 죽
이려 하였다. 여행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여 바로 서쪽으로 향해 달렸는데 갑자기 나타난 이 대하(大河)를 보고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이 강은 남북으로 끝이 없고, 한가운데에 외길의 하얀 길이 보이지만, 그 길은 극히 좁다. 동서(東西)의 양 기슭 사이는 가깝지만,
어찌 건널 수 있겠는가? 나는 오늘 틀림없이 죽고 말 것이다. 동쪽으로 되돌아가려면 도적과 무서운 짐승들을 피할 수 없고, 남쪽이
나 북쪽으로 도망치려 하면 무서운 짐승이나 독충이 앞다퉈 나를 향해 온다. 서쪽을 향해 길을 찾아가려고 하면, 아마 물과 불의 강
에 떨어질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두려움에 놓여 있다. 그러나 여행자는 마음속으로 일대 결심을 하게 된다. “어차피 되돌아가도 죽고, 머물러도 죽고, 나아가도 죽는다면 차라리 이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자. 길이 있으니 반드시 건널 수 있을 것이다”라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동쪽 기슭에서 “그대는 망설임 없이, 그냥 이 길을 따라가라. 결코, 죽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그
대로 거기에 있는다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는 권유의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서쪽 기슭에서도 다른 소리가 들렸는데, “그대는 일
심으로 망설임 없이 곧장 오는 것이 좋다. 내가 그대를 지키리라. 물의 강이나 불의 강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는 여행자를
부르는 소리였다. 여행자는 이쪽의 기슭에서는 가라고 권유받고, 저쪽 기슭에서는 지킬 줄 것을 말하며 오라는 부름을 들은 이상, 그
대로 받아들여 조금도 의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또 도망갈 생각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길을 따라 똑바로 서쪽으로 나아갔다.
조금 갔을 때, 동쪽 기슭에서 도적들이, “야, 돌아와. 그 길은 위험하다. 도저히 저쪽 기슭까지는 갈 수 없다. 틀림없이 죽고 말 것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너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야”라며 여행자를 회유한다. 그러나 여행자는 그 소리를 듣고도 뒤돌아보지 않고 한눈팔지
도 않고 그 길을 따라 나아가 곧 서쪽 기슭에 이르러 영구히 여러 가지 재앙을 떠나 좋은 친구와 만나 기쁨도 즐거움도 끝이 없었다.
이상은 비유이다.
위에서 말한 비유의 의미를 법의(法義)에 맞게 설명하면 「동쪽 기슭」은 미혹의 사바세계를 비유한 것이고, 「서쪽 기슭」은 극락세계를 비유한 것이다. 「도적이나 무서운 짐승이 다가옴」은 중생의 육근(六根)·육식(六識)·육진(六塵)·오음(五陰)·사대(四大)를 비유한 것이다. 「인적이 없는 광야」는 언제나 나쁜 친구만을 쫓을 뿐, 진정한 선지식을 따르지 않음을 비유한 것이다. 「물과 불의 두 강」은 중생의 탐욕과 집착의 마음을 물에 비유하고, 분노와 미움의 마음을 불에 비유한 것이다. 「두 강 사이에 있는 4, 5촌 정도의 하얀 길」은 중생의 탐과 분노의 마음속에 청정한 믿음(신심)이 일어나는 것을 비유한 것으로, 탐욕과 분노는 왕성하므로 물이나 불에 비유하고, 믿음의
상태는 약하기 때문에 4~5촌 정도의 하얀 길에 비유한 것이다. 또, 「세찬 파도가 길을 덮치고」는 탐욕의 마음이 일어나, 믿음을 더럽히려는 것을 비유하며, 또 「불길이 하얀 길을 태운다」고 하는 것은, 분노의 마음이 믿음(신심)의 공덕이라는 보물을 태우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곧장 서쪽으로 향하다」는 것은 자력의 행을 모두 떨쳐 버리고, 즉시 정토로 향함을 비유한 것이다. 「동쪽 기슭에서 들
리는 소리를 듣고, 길을 따라 똑바로 서쪽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석존은 이미 입적하시어 후세 사람들은 석존의 모습을 바라볼 수 없
지만, 남겨진 가르침을 들을 수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즉 이를 목소리에 비유한 것이다. 「도적 등이 부른다」라고 하는 것은, 본원 타
력의 가르침과 다른 길을 걷는 사람이나, 잘못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염불의 행자는 제멋대로의 생각하여 서로 혼란스럽게 하고, 또 자기 자신이 죄를 만들어 깨달음의 길에서 벗어나, 그 이익을 잃을 것이다」라고 함부로 말함을 비유한 것이다. 「서쪽 기슭에서 부
르는 소리」는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의 마음을 비유한 것이다. 「곧 서쪽 기슭에 도착해, 좋은 친구와 만나 기뻐한다」는 중생은 오랫동안 미혹의 세계에 빠져 헤아릴 수 없는 먼 옛날부터 자신의 업에 묶이어 생사를 반복하는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아신 석존께서
서방정토로 왕생을 권하시고 또 아미타불께서는 큰 자비의 마음으로 정토로 오라고 부르심을 받으니, 지금 석존과 아미타불의 마음
에 신순(信順)하여, 탐욕과 분노의 물과 불의 강에 이끌리지 않고, 오직 염불하여 아미타불의 구제하심에 몸을 맡기고, 이 세상의 생
명을 마치고 정토에 왕생하여, 부처님과 만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을 빗댄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합장
‘전수(專修)’
란 오직 한 가지 수행을 전념하여 실천하는 것을 말하며, ‘전수염불’은 다른 수행법(선정, 지관, 관상 등)을 배제하고 오직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며 수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무량수경』 제18원에서 아미타불이 「나의 이름을 10번만 불러도 반드시 왕생케 하겠다」고 서원(誓願)하신 데에서 유래합니다. ‘전수염불’이라는 단어는 일본의 정토종을 창건한 법연상인 『선택본원염불집』에서 주장한 수행 방법으로 그 대표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른바 ‘선택본원염불’이라 함은, 아미타불께서 선택하신 본원의 수행이다. 그러므로 모든 범부 중생은 이 염불을 근본 수행으로 삼고, 그 밖의 수행은 보조 수행(助行)으로 삼아야 한다. 만약 다른 수행도 근본 수행이라 한다면, 이는 부처님의 본원(本願)에 어긋나는 것이다. 만약 이 염불을 보조 수행이라 한다면, 이는 부처님의 선택(選擇)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염불을 오직 하나의 수행으로 삼아 전심으로 닦는 것이야말로 정정업(正定業)이니, 이는 아미타불의 본원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알아야 할 것은, 아미타불께서 법장비구로서 48대원을 발하실 때, 염불 수행 하나만을 바르게 선택하시어 정행(正行)으로
삼고, 그 밖의 모든 수행은 잡수(雜修)라 하셨다는 점이다. 만약 바른 수행(正行)에 다른 수행을 섞으면, 더는 정행이라 부를 수 없고, 그것은 바르지 않은 수행이라 할 것이다.」
때문에 전수염불을 하는 행자는 자신에 능력이나 노력을 믿고 의지하는 자력적인 염불보다는 아미타불에 본원을 믿고 맡기는 타력
염불을 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염불 수행을 자력과 타력(불력)이 조화롭게 작용하여야 극락왕생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처럼 들릴 수 있지만 극락왕생(성불)을 목표로 하는 행자라면 반드시 자력을 버리고 타력에 의탁해야 합니다.
물론 처음 정토문에 입문하여 염불하는 사람에게 처음부터 타력 염불을 시키는 것은 맞지도,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아미타불의 본원을 의심 없이 믿기란 쉽지 않을뿐더러, 지금까지 자신에 해오던 수행 방법을 버리기가 정말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처음엔 입으로 명호를 자기의 근기에 맞추어 부르는 것이 중요하며, 또한 선지식들에게 정토 법문을 시간이 날 때마다 청해 들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 생각에 이끌려 다니지 않고 아미타불의 본원에 승탁(乘託)하
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순간이 바로 타력 염불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수 염불을 하다 보면 저절로 처음엔 자력으로 시작해서 다음엔 자력+타력으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완전한 타력의 염불로 바뀌는 것이 염불 수행의 핵심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수염불은 오로지 아미타불의 서원을 믿고 「나무아미타불」의 육자명호만을 부르는 것입니다.
「염불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나무아미타불의’ 여섯 자를 부르는 것에는 모든 행이 구족(具足)되어 있습니다. 마음으
로는 본원에 의지하고 입으로는 명호를 부르며 손으로는 염주를 돌릴 뿐입니다. 명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반드시 극락왕생이 이루어
지는 더할 나위 없는 행입니다.」 〈법연상인〉
나무아미타불 합장
1. 염불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불교에서 믿음(信)은 단순한 감정이나 충성심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신뢰, 깨달음의 가능성에 대한 수긍, 부처님과 그 가르침에 귀
의하는 내면으로부터 생기는 것으로, 이 믿음이 약하면 수행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믿음을 갖는 위해서는 석존의 가르침을 이해하거나 수행을 통하여 깨닫는 방법이 있고 또 신앙적인 체험을 통하거나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믿음을 쌓아가지만, 그 믿음을 끝까지 지키고 유지하기가 쉽지 않기에 믿음을 쌓는 또 다른 수행에 매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미타여래의 명호를 부르는 수행은 그러한 과정이 없이도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염불은 중생들의 어떠한 근기나 믿음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염불 수행은 아미타불의 명호와 만나는 인연만으로 모든 수행이 시작되며 그 믿음은 아미타여래께서 약속하신 염불의 행으로 자신도 모르게 채워져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나의 복장 상태나 장소 그리고 시간과 상관없이 나의 입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행위만으로 종교적인 체험과 석존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또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염불 수행을 꾸준히 하다가 보면 아미타불의 본원을 의심하는 마음은 사라지고 자신이 진실하지 못함을 깨닫게 되는데 이때 비로소
지금과는 다른 강한 믿음이 생겨나며 이것을 ‘신심’이라고 합니다. 이때 생긴 믿음은 나의 노력과는 아무런 상관 없이 생겨난 것으로, 아미타불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므로 절대로 깨지지도, 절대 흔들지도 않으며, 차별도 없기에 남녀, 노소(老少), 빈부(貧富)의 격차, 어리석음과 현명함과 상관없이 모두 동일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를 ‘신심획득(信心獲得)’, 또는 ‘신심결정(信心決定)’이라고 하며 이러한 믿음이 생겼을 때 보리심(發菩提心)이 발(發)하였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믿음은 극락왕생의 정인(正因)이 되며 염불 수행의 완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처음 「나무아미타
불」의 명호와 만나는 사람들을 보면 어렵지 않은 발음임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발 음이 나오지 않아 ‘나미아미타불’ 이라고 소리 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 명호를 부
르는 사람은 천천히 한 글자씩 소리를 내어야 합니다. 염불은 하는 횟수의 많고 적음보다는 아미타
불의 마음(본원)을 어떻게 내가 수용(受容)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기에 빠르게 많이 하려고 하는 마
음을 비우고 조금씩 매일 횟수를 늘려가는 방법이 좋습니다.
처음 염불을 시작하면 염불하는 주체가 나라는 생각에 조금 더 정성스럽게 하려고 하거나 혼란한
나의 마음 상태를 걱정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아직도 부처님의 본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
문에 생기는 현상으로 아미타불의 본원은 중생의 번뇌가 있고 없음, 죄의 많고 적음, 마음의 집중
상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오직 부처님의 본원력으로 중생을 구제하시기에 자신이 주인공이 되
려는 염불 방식은 옳지 않은 방법입니다.
염불 수행을 시작하시는 분들에게 자주 듣는 질문은 마음을 집중하여 일심으로 염불하려 하지만 자꾸 잡념이 생겨 집중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너무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미타불께서 오겁(五劫)이라는 긴 시간을 사유(思惟)하신 이유는 바로 무명 번뇌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음을 아시고 중생들을 위하
여 대자비의 비원(悲願)을 일으키신 것이며, 그 원을 성취하신 후 육자명호로 자신의 공덕을 중생에게 회향하여 주시는 것이기에 나
의 번뇌나 나의 마음 상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염불 수행을 하다가 보면 자신의 무능함 그리고 자신의 교만함과
거짓됨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 상태로 꾸준히 염불을 하면 아미타불의 본원력이 작용하여 천천히 마음
에 안정을 찾고 잡념이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염불의 불가사의한 힘은 우리의 탐심(貪心)을 아미타불께 귀의하는 귀명심(歸命心)으로 진심(嗔心)은 자신의 교만하고 삿됨을 일깨워
주는 감사함과 참회하는 마음으로 치심(癡心)을 지혜로 전환(轉換) 시키기에 염불하는 행자는 어떠한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을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염불’과 ‘명호’와 ‘신심’의 관계
‘명호’는 아미타불께서 수행하실 때 중생들을 위하여 오겁사유(五劫思惟)를 하시고 48원을 세워 조재영겁(兆載永劫)이라는 긴 시간
을 수행하여 그 원을 성취하신 결과물입니다. 따라서 명호는 아미타불의 본 모습이며 그 명호가 중생들의 마음에 도달하면 ‘신심’이 되고 그 명호가 우리의 마음속에서 작용하여 우리를 구제하시는데 그 모습이 소리로 입을 통하여 나오는 것이 ‘염불’인 것입니다.
즉 명호와 신심과 염불은 모두 참된 부처님의 모습으로 염불은 부처님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고귀하고도 수승(殊勝)한 행인 것입니다.
아미타불의 본 모습이 명호, 그 명호가 중생의 마음에 들어오면 신심, 그리고 그 신심이 작용하여 중생을 구제하는 모습이 염불 입
니다. 때문에 염불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아미타불께서 중생을 구제하시는 모습이며 중생들을 애타게 부르는 소리입니다.
나무아미타불 합장.
염불하여 신심을 획득하는 사람은 그 순간 불퇴전에 이르고 죽어서는 극락왕생하여 성불하는 과정까지 도달하는 이익을 얻습니다.
이는 과거와 현제의 업이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해서 소멸되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만약 여러분들이 자신이 쌓은 무섭운 업의
장애로 인해 여러가지로 고통을 받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망설이지말고 염불을 해야 합니다. 업장소멸 하는 방법 중에 염불보다 더
빠르고 쉽운 길은 없습니다. 염불을 하는 행자는 현세에서는 불보살님들과 신장들에 위해서 보호를 받으며 살다가, 죽어서는 극락에 태어나 부처가 되는 수승한 이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중국 임제종의 육조이신 혜능대사께 “염불하면 무슨 이익이 있습니까?”라고 하는 제자들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일념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하면 생기는 이익은,

① 만세(萬世)의 괴로움을 떨어버리는 묘도(妙道)요.
= > 염불은 무량겁을 윤회 해온 괴로움을 끊고 해탈로 이끄는 가장 뛰어난 길이다.
② 성불(成佛)을 이루고 조사(祖師)되는 정인(正因)이요.
= > 부처가 되고 조사(祖師)의 경지에 오르게 하는 바른 인연이자 원인이다.
③ 삼계인천(三界人天)의 안목(眼目)이요.
= > 욕계·색계·무색계에서 헤매는 사람들과 천인에게 바른길을 보게 하는 눈이 된다.
④ 마음을 밝히고 불성(佛性)을 보는 혜등(慧燈)이요.
= > 어두운 번뇌를 밝히고 본래 갖춘 불성을 깨닫게 하는 지혜의 등불이다.
⑤ 지옥(地獄)을 깨트리는 맹장이요.
= > 염불은 지옥의 문을 부수고 구제하는 용맹한 장수와 같다.
⑥ 올바르지 못한 것을 베는 보검(寶劍)이요.
= > 삿된 견해와 집착을 끊어내는 보배로운 검이다.
⑦ 오천대장(五千大藏)의 골수(骨髓)요.
= > 수많은 불전(佛典)과 경장의 정수, 핵심이 바로 염불이다.
⑧ 팔만총지(八萬總持)의 중요(重要)한 길이요.
= > 팔만 법문의 핵심이자 이를 종합해 들어가는 주요한 수행의 길이다.
⑨ 흑암(黑暗)을 여의는 명등(明燈)이요.
= > 무명의 어둠을 밝히는 밝은 등불이요, 수행자가 가야 할 길을 비추는 빛이다.
⑩ 생사(生死)를 벗어나는 좋은 방법이요.
= > 생사윤회를 벗어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신속한 길이다.
⑪ 고해(苦海)를 건너 늘 타고 갈 배요.
= > 생사 고통의 바다를 건너 극락에 이르게 하는 자비로운 배이다.
⑫ 삼계(三界)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이요.
= > 삼계에서 벗어나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는 가장 빠른 길이다.
⑬ 최존최상(最尊最上)의 묘문(妙門)이며 무량무변(無量無邊)의 공덕(功德)이니라.
= > 가장 존귀하고 가장 뛰어난 신비로운 수행법이며, 그 공덕은 무량하고 끝이 없다. 모든 수행의 총결론이자 완성이다.
염불 수행은 위와 같이 깨달음으로 가는 최고의 길이며 방법입니다. 또한 현세에서는 중생들의 소원을 미리 아시고 적절한 때에
반드시 성취시켜 주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중생들은 자신의 소원을 비는 기복적인 염불보다는 모는 것을 아미타불께 맡기고 염불하는 행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무아미타불 합장